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클렘페러 (문단 편집) === 미국 시절 === 이후 클렘페러는 빈과 [[잘츠부르크]]에서 활동하기는 했으나 지휘 작업이 많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. 때마침 [[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]]의 상임지휘자 직을 제의받아 [[1935년]] 미국으로 떠났다. LA에서 그는 브루크너, 말러, 쇤베르크[* 이 무렵에 클렘페러에게 작곡 수업을 제공했다고 하는데, 실제로 클렘페러는 쇤베르크를 '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작곡 교사'라고 극찬하기도 했다.], 스트라빈스키 등 당시의 보수적인 청중들에게는 생소했던 곡들을 지휘했다. 1936년에는 [[아르투로 토스카니니]]의 뒤를 이어 [[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]]의 상임 지휘자가 될 뻔했으나, 바로 전 해인 1935년에 말러의 교향곡 2번을 지휘했다가 5천 달러[* 2023년 기준으로는 무려 10.9만 달러(약 1.3억 원)나 되는 거액이다.]의 적자를 본 적이 있었던 클렘페러는 이 요구를 거절했다. 1938년 초에는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으로 임명하겠다는 계약을 보고는 흡족해하며 피츠버그에서 연주회를 열어 성공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으나,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렘페러는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이 되라는 요구도 거절했다[* 이후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은 헝가리 출신의 명지휘자 프리츠 라이너(Fritz Reiner, 1888~1963)가 맡게 되었다.]. [[1939년]]에 클렘페러는 '잠재적으로 치명적인' [[뇌종양]]을 진단받고는[* 이는 1933년에 있던 전술한 추락 사고가 원인이었다.] [[보스턴]]에 가서 수술을 받았으나, 수술 후유증으로 발을 절게 되고 오른쪽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었으며, [[양극성 장애]]도 가지게 되어 그 후유증으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상임에서 퇴출되게 되었다. 특히 수술 후 첫 3년 동안은 심각한 조증 단계를 겪었는데, 실제로 1941년에는 친구들이 [[색정광]]을 연상시킬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던 클렘페러를 겨우겨우 뉴욕에 있는 정신요양원에 데리고 갔으나 얼마 안 가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정신요양원에 입원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. 사건도 사건이었으나 이 사건을 다룬 [[뉴욕 타임스]] 기사가 '클렘페러 도망, 성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다'는 등으로 제목을 자극적으로 뽑았기 때문에 미국에서 클렘페러의 평판은 완전히 추락해버렸다. 그 후에는 장기간 심한 [[우울증]]을 겪었다. 미국에 있는 동안 클렘페러는 공식적인 녹음을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[* 물론 당시에 지휘한 라디오 방송 실황 같은 경우에는 진작에 방송용 녹음이 남겨져 후에 음반으로 발매되었다.]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